국궁(散文)

겸재와 나..

활, 시리우스(弓痴) 2022. 5. 12. 10:15

 

비가 내린 仁王山에 휘감긴 몇 장의 구름이 빗물에 젖은 주봉을 어루만지며 유유자적하게 흘러간다.

 

수 세기전 겸재(謙齋) 정선(鄭歚, 1676~1759)는 지금의 효자동과 청와대 부근에서 이 비경을 보고 그 감흥을 이기지 못해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를 그렸다. 매일 보는 그 산에 무슨 진한 감동이 있었는지 자연이 빚어낸 생활속의 비경에 겨워 그 감동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는 서둘러 먹을 갈았을 것이다.

 

영겁의 세월을 버텨온 그 투박한 바위에 빗물이 스며들 즈음 때를 같이하여 그 짙은 먹물이 두꺼운 한지에 스며드는 순간 세기의 역작 [仁王霽色圖]이 완성되었다.

 

그는 특유의 웅장한 필치로 비에 젖은 주봉을 힘차게 표현했으며 먹의 농담(濃淡)으로 그 가파른 경사를 가지고 놀았다.

 

그가 그림에서 표현한 인왕산은 그의 시야에 다 들어온것이 아닐텐데 그는 알맞은 구도에서 우수에 찬 인왕을 적나라하게 우리에게 제시한다.

 

그 후로 수 세기가 흘러 나는 그 주봉의 맞은편인 현저동(안산 아래)에서 다시 비에 젖은 주봉을 보면서 수 세기전 그가 맞은편에서 느낀 동일한 감동을 느끼며 이 글을 쓴다. 交感이란 단어가 이 시공을 초월한 두 사람의 공통점을 완전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

 

겸재와 나, 그 와 나 사이엔 감동을 준  인왕산이 가로 막고 있으며 수세기란 세월이 버티고 서 있지만 시간과 바위산을 관통한 영험한 通情이 그와 나를 한결 가깝게 느끼게 한다.

 

 

- 2008년 8월 비오는 어느 여름날에 씀.

 

 

☞ 편집자 주

 

2007년 8월 오랫동안 인천에서 살다가 지금의 보금자리로 이사 온 날 . 그 날도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약간 센티한 날이어서 비에 젖은 인왕산 주봉을 보며 쓴 글입니다. 그 때는 인왕산 기슭에 황학정이 있는 지도 몰랐고 그저 바위산만 눈에 들어왔었는데 세월이 흘러 그 기슭에 자리잡은 황학정에서 활을 내는 저를 생각해보면 '어쩌면 운명인가 보다 !'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시간도 바위산도 관통한 영험한 통정이 다시 제 마음속에서 일어나기를 소망해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