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國弓), 그 치명적인 유혹..
[4] 열두대(탄금대 평행이론).. 본문
1976년 12월 21일 충청북도기념물 제4호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7월 9일 명승 제42호로 변경되었다. 탄금대는 본래 대문산이라 부르던 야산인데, 기암절벽을 휘감아돌며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과 울창한 송림으로 경치가 매우 좋은 곳이다. 탄금대란 신라 진흥왕 때 우리나라 3대 악성(樂聖) 중 하나인 우륵(于勒)이 가야금을 연주하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출처:네이버]
[탄금대 열두대]
윗 글의 소개와 같이 탄금대는 대문산을 중심으로 남한강 상류와 달천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으며, 기암절벽에 송림이 우거져서 남한강과 조화을 이뤄 가히 절경이라고 할 수 있다. 552년 신라진흥왕 13년 가야국에서 우륵이 가야금을 들고 신라에 귀화하는데 이를 어여삐 여긴 진흥왕의 배려로 충주에서 살게 되었고 남한강변의 경치 좋은 곳에서 가야금을 연주함으로 인해 탄금대라는 명칭을 얻게된다.
통일신라시대에 있었던 이 에피소드는 이후 1592년 임진왜란을 맞아 당대 조선 최고의 장수로 자타가 공인하던 신립장군의 비극적인 죽음과 맞물리면서 음악과 전쟁이라는 두 개의 장르가 탄금대라고 하는 역사적 공간에서 교차된다.
☆ 신립의 패러독스
1. 나는 새도 한번에 넘을 수 없어 쉬어 넘는다는 천혜의 요새 조령을 방어진지로 이용해 보지도 못함.
2. 북쪽 오랑캐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불세출의 기마전술을 펼쳐보지도 못함.
3. 자국에서 치러진 전쟁에서 적보다 병력수가 현저히 부족함. [일본 정규군(18,000) : 조선 비정규군 포함(8,000)]
4. 조총에 맞서고 남한강을 등진 상태로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쳐야만 했음.
원래 신립은 성격이 괴팍하고 급한 단점이 있긴했지만 북쪽 오랑캐의 준동을 제압한 당시 조선 최고의 장수로 이름을날렸었다. 여진족의 추장이었던 이탕개가 난을 일으켰을때 중장기병 500기로 10,000명의 여진족을 물리칠 정도로 용맹이 뛰어났고 기마전술의 달인이었다. 하지만 신립이 가진 괴팍하고 급한 성격이 이러한 혁혁한 전과와 결합되면서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참담한 패배로 귀결 되는 단초를 제공한다.
임진왜란 초기 동래성을 시작으로 파죽지세로 밀리는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해 조정에서는 신립을 삼도순변사로 임명한다. 하지만 어이 없게도 부장 김여물을 포함하여 불과 80여명의 군관과 비정규군을 포함하여 수백명을 모병하여 충주로 떠난다. 그런데 막상 전장에 도착해보니 이미 이일의 군대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달아났으므로 상주마저 함락된 상태였다. 이에 신립은 문경으로 출동하는데 신립의 병사는 사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기는 하나 대략 8천에서 1만정도로 추정된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발생한다. 이일은 왜군의 수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대군이라고 보고했고 따라서 부장 김여물은 아군의 수가 열세이므로 조령에서 잠복 전투를 벌일것을 주장하였다.그러나 기병의 활용을 적극 주장한 신립의 결정에 따라 군대를 돌려 탄금대로 이동한다.
☆ 신립의 비극
1. 성격이 괴팍하고 급하여 전후상황에 대한 판단이 없었고 과거 중장기병 전승 기록에 대한 공명심이 화를 불렀다.
2. 작전이 잘못 되었을 경우에 대비한 플랜 'B'가 없었다. 대부분의 조선군은 남한강에서 참살당하고 익사한다.
3. 이미 나가시노 전투에서 일본 최고의 기병대 다케다 군대가 오다 군의 철포에 의해 유린당했던 조총의 위력을 간과했다.
4. 남한강에서 배수의 진을 친 전날 내린 비로 질척해진 남한강변은 철썩같이 믿고 있던 기병의 발목을 잡는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예를 들어 적을 보면 도망치는 오합지졸로 조령에서 매복/기습작전을 펼치기엔 무리가 있다고 신립이 판단했고 또 아군의 사기를 한방에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배수진을 치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 신립의 고육책이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긴 있다. 하지만 장수의 잘못된 판단으로 말미암아 전군이 전멸하는 치욕적인 패배를 당했고 전 군은 물론 전 국민의 항전의지에 찬물을 끼얻는 치명적인 결과를 도출하고 만다.
이 전투에서 열두대로 묘사되는 탄금대 서북쪽 암벽인 층암절벽에 얽힌 일화는 활배우는 사람의 입장에서 마음을 짠하게 만든다. 열두대란 신립이 왜적과 싸우는 군사들을 독려하기 위해 활 시위를 식히고자 열 두번이나 뛰어 올랐다는 전설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다시말해서 전투가 너무 격렬하여 신립장군도 활을 수도 없이 쏘다 보니 활 시위가 열이 나서 그 열을 식히기 위해 활을 남한강에 적셨다는 내용이다.하지만 강과 열두대의 경사가 너무 급해 사람이 뛰어 오를 수 없는 절벽이기 때문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신립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 일 가능성이 높다.
가야금 현의 갯수는 12현이다. 어쩌면 미래의 이 지점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될 장군의 넋을 기리기 위해 우륵의 가야금 소리가 그렇게 처연하게 탄금대를 적셨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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